[통일뉴스] 여성 빨치산 변숙현 - 내가 평생 바라던 것이 조국의 통일과 여성해방

[여성 빨치산 변숙현 - 내가 평생 바라던 것이 조국의 통일과 여성해방]
《통일뉴스》
https://www.tongilnews.com
2023년 9월 20일
[ 본 글 ] [ P D F]



《여성 빨치산 변숙현, 백수 누리고 소천》

“내가 평생 바라던 것이 조국의 통일과 여성해방”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이 20일 낮 12시 45분 경기도 성남시 한 요양원에서 백수를 누리고 소천했다.

빈소는 경기도 성남중앙병원장례식장 201호에 마련됐으며, 22일 오후 6시 장례식장에서 추도식을 가진 뒤 23일 발인할 예정이다.

1924년 전남 장성군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5년 남로당 전북 장수군당위원장을 역임한 고 박태원과 결혼했고, 해방공간에서 여맹 활동을 벌이다 1950년 빨치산으로 입산, 1952년 군경토벌대에 생포됐다.

고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상하며 “긍께 거그서는 서로를 존중허지.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여자나 남자나 평등헝께로. 하고 싶었던 공부를 원없이 많이 했제.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 행복하고”라고 말한 바 있다.

남원 포로수용소와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쳐 징역 20년형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청주교도소에서 옥중 생활 중, 1960년 동생의 도움으로 재심 판결을 받아 출소했지만 1961년 동상으로 악화된 왼쪽 팔을 절단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지냈다.

1990년부터 통일광장과 전국여성연대,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2022년 7월 성남요양원 입소했다가 오늘 소천했다.

한 여성회 활동가는 “선생님은 자기 관리가 굉장히 철저하신 분”이라며 “‘내가 몸이 늙고 팔은 하나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이것이 신념이신데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고인은 생전에 “빨치산은 이름낼라고 한 사람은 없었어. 목숨은 내걸었지만. 목숨을 내걸면 한 개도 두려운 것이 없어. 한평생 그저 바쁘게만 살았어. 내가 평생 바라던 것이 조국의 통일과 여성해방인디, 내가 이거라도 해야쓰지 않겄소?”라고 여성 빨치산으로서 일관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변숙현 선생님은 조직에 복무할 줄 아는 사람, 병상에서도 회비를 내는 사람”이라며 “고령에도 총명하셔서 나의 아이들 이름과 근황까지도 기억하셨다”고 회고했다.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는 “변숙현 선생님은 어머니의 품성을 지니신 분”이라며 “남편의 영향을 받아 여성전사로 살았지만 전형적인 우리의 어머니 상이다. 심지가 굳으신 분”이라고 기렸다.(끝)



[고 변숙현 선생 약력]

1924년 전남 장성군 북일면 1남 1녀 장녀로 출생
1943년 북만주로 이주
1945년 박태원과 결혼, 남편(남로당 전북 장수군당위원장)의 입산
1946년 민가에서 여맹활동 시작
1947년 아들 출산. 조선노동당 입당
1948년 남편 박태원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여로 북행
1949년 수배령으로 피신 생활
1950년 빨치산 입산
1952년 전라남도 순창군 용골산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생포
1952~1960 남원 포로수용소, 광주 포로수용소 6개월 복역
최종 징역 20년형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청주교도소 수감
1960년 (동생 도움으로 재심) 출소. 가족과 재회
1961년 동상으로 악화된 왼쪽 팔 절단 수술. 부안에서 친정 부모, 아들과 농사
1965년 친정집에서 아들과 독립
1973년 거주지 제한을 어기고 서울로, 1974년 성남으로 이사
1990년 통일광장과 전국여성연대,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2022년 7월 5일 성남요양원 입소
2023년 9월 20일 12시 45분 소천

(자료 제공 - 통일광장)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 추도식 - 변숙현 선생님은 제겐 빨치산 여전사가 아니라 따뜻한 할머니셨다]
《통일뉴스》
https://www.tongilnews.com
2023년 9월 23일
[ 본 글 ] [ P D F ]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 추도식》


“변숙현 선생님은 제겐 빨치산 여전사가 아니라 따뜻한 할머니셨다.”

백수를 누리고 소천한 여성 빨치산 변숙현 선생을 기리는 추도식이 22일 오후 6시 성남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서향수 성남여성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변숙현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이같이 밝히고는, 생전에 고인에게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한마디로 고인의 운명을 결정지은 슬프고도 기구한 에피소드였다.

서 회장은 “선생님이 오래전 활동하실 때 남편을 통 못 봐서 보고 싶기도 하고 해서, 조직생활 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데 하루 종일 강가 바위 위에 앉아있다가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어디 갔다 왔냐며 남편이 다녀갔다고,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일행들과 함께 왔었다고 말을 했다”면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셨다”고 기억했다.

계속해서 서 회장은 “그 길로 선생님이 10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진주로 찾아갔는데 진주에서 ‘남진’이란 글자만 써 있는 걸 보고 돌아왔다”고는 “선생님은 그 후로 남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하셨다”며 안타까움을 소개했다.

고인은 장기수이기에 통일광장에서, 여성이기에 전국여성연대에서 그리고 거주지가 성남지역이기에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날 추모식에는 여성들, 특히 성남지역 여성들이 많이 참석했다.

자연히 ‘말잔치’를 이룬 추도식에서도 여성 인사들의 추도사가 주를 이뤘다.

이날 추도사는 임방규 통일광장 전 대표를 시작으로 윤희숙 진보당 대표,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김미희 전 의원, 서향수 성남여성회 회장, 손미희 여성연대 대표, 최은아 6.15남측위원회 사무처장, 김지영 해솔내과 원장, 조순덕 민가협 회장 순으로 이어졌다.

구순을 넘긴 임방규 전 대표는 백수를 누린 고인이 들으라는 듯 “저희들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기에 이제 만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더러 한다”면서, 한 동지가 “우리 잘 살았어?”하고 물으면 다른 동지가 “참 잘 살았고 말고”라고 답한다면서 “외부 사람들은 우리 대화를 이해 못할 거야”라고 빨치산과 장기수로서의 삶의 편린을 내보였다.

윤희숙 진보당 대표는 “선생님은 늘 후배에게 더 좋은 나라, 자주국가를 물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왔다”면서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고 결의를 밝혔다.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는 “선생님께 배울 게 더 많은데 이제 뵐 수 없게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는 “백 살의 연세임에도 선생님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김미희 전 의원은 “선생님은 통일운동만이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는 “성남에서 활동한 선생님 덕분에 성남에는 여성운동이 많이 활성화돼 있다”고 고인의 활동을 기렸다.

손미희 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는 “선생님과 지리산과 회문산에 간 적이 있다”면서 “선생님은 나이가 드셔서 평지도 잘 못 걷는 편인데 희한하게 산에 갈 때 선생님의 모습이 가장 편안하고 잘 걸으셨다”며 놀라워했다.

최은아 6.15남측위원회 사무처장은 “2000년에 사회활동을 처음 할 때 선생님을 뵈었다. 그때 변숙현 선생님과 함께 지금은 작고하신 박정숙, 김선분 선생님과도 함께 만났다”면서 “세 분 모두 자그마한 체구에서 그렇게 열심히 투쟁할 수 있는 근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늘 궁금해 했다”며 오랜 긍금증을 전했다.

김지영 해솔내과 원장은 “그전에 가락시장 근처에 살 때 전철에서 선생님을 자주 만났다”면서 “나는 퇴근을 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는데 선생님은 늘 시내에서 시위를 하고 성남 댁으로 들어가시는 길이었다”고 회고하고는 “선생님은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담백하고 단단하고 그리고 순수하셨다”고 기렸다.

조순덕 민가협 회장은 “선생님은 민가협 어머니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 주셨다”고는 “전철표를 종이딱지로 사용하던 때 선생님이 전철표를 어디서 구해왔는지 잔뜩 들고서 목요집회에 오셔서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종이 전철표를 일일이 나눠주셨다”고 따뜻한 일화를 전했다.

계속해서 전남병 ‘고난함께’ 목사, 조원호 통일의길 대표, 이태형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긴 추도사 행렬 중간중간에 가수 이수진 씨의 ‘심장에 남는 사람’ 등의 노래와 양은미 씨의 오카리노 연주가 이어졌으며 그리고 고인의 삶과 활동을 엮은 동영상과 사진이 상영되었다.

끝으로 고인의 손자가 나서 가족인사를 대신했다. 손자는 “할머니는 우리를 사랑과 인자함으로 키우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통일을 위해 사셨다”고는 “우리도 통일이 이뤄지길 바란다. 그 길에 우리 가족들도 함께 하겠다”며 고인의 뜻을 따르겠다고 짧고 굵게 밝혔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은 추도사를 한 인사들 외에도 조영건 통일원로, 장남수 유가협 회장 등을 비롯해 8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여했다.

한편, 1924년 전남 장성군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5년 남로당 전북 장수군당위원장을 역임한 박태원과 결혼했고, 해방공간에서 여맹 활동을 벌이다 1950년 빨치산으로 입산, 1952년 군경토벌대에 생포됐다.

남원 포로수용소와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쳐 징역 20년형 선고받고 옥중 생활 중, 1960년 재심 판결을 받아 출소했다.

1990년부터 통일광장과 전국여성연대, 성남여성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지난 20일 소천했다.(끝)
주인으로 삽시다 !
우리 스스로와 사랑하는 후세대를 위하여 !
사람(人) 민족 조국을 위하여 !!



《조로공동선언 : 2000년 7월 19일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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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 승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한미동맹파기! 미군철거!!

주권主權을 제 손에 틀어쥐고, 주인主人으로서 당당하고 재미나게 사는 땅을 만들어, 우리 후세대에게 물려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