血狗夜叉(혈구야차) 다카기 마사오
[血狗夜叉(혈구야차) 다카기 마사오]
림구호
《血狗夜叉(혈구야차 : 피투성이 개 같은 악귀) : 다카기 마사오》
오는 4월9일은 "세계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된 "사법살인" 50주년 입니다. 국가폭력의 사법학살 범죄자가 추앙받는 현실이 기가막힙니다. 국가폭력에 생명과 존재가 파괴 수난 당한 사람들의 상처는 아물 여지조차 압류된 상태입니다.
무능하고 게을러 이제 겨우 짧은 글을 정리하여, 10회로 나누어 포악한 가해자의 죄상을 폭로하려 합니다. 부분적이고 여물지 못한 글 입니다. 눈물을 비명을 쓰다듬는 손길로 읽어 주시길 기대합니다.
6-1) [전쟁권력 反人악귀] 2025.3.6.
※ 전쟁권력은 군사무력으로 권좌를 찬탈하고,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비상사태로 권력과 권세를 유지 재창출하며, 주권자인 백성을 향해 총구를 겨누거나 발포하는 권력을 지칭한다.
6) 血狗夜叉(혈구야차 : 피투성이 개 같은 악귀) : 다카기 마사오
(高木正雄, 일명 岡本実 오카모토 미노루 : 6~70년대 별칭 ☆①)
(79.10.26.)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일본 외교관)
[벚꽃길 따라]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꽉 다문 입 꼬라지”, “어허 그놈 뒤 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은 “청백리”가, 시인 김지하가 담시 “오적”에서 노래한 다카기 마사오다.
일본군국주의 36년이 "조센징 사냥꾼"으로 훈련시켜낸 ‘금시계’ 등급이다.
‘8.15민족해방’과 ‘4.19민주혁명’을 군화발로 짓뭉갠 사무라이 칼춤을 즐긴 만주 관동군이다.
1961.5.16. 민족통일 운동가와 민주투사들을 서대문형무소에 강금, 피의 신새벽을 연 한국명 박정희다.
지금은 TK왕국에 “반신반인”의 구리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혈구야차 박정희는 모진 운명을 타고 태어난 추종불허의 ‘악바리’였다.
일제가 하사한 급장권세의 ‘대추방망이’를 틀어쥐고, 소학교 38명 급우들을 쥐 잡듯 따귀 때리며 몸을 만들어 대구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4학년 73/73위, 5학년 69/70위의 성적으로는 급장권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리카(有川)와 교련훈도의 각별한 총애 속에 권투와 검도, 그리고 나팔소리로 상실의 울분을 삭혔다 한다. 이런 뒤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던 문경소학교 식민지 훈도로 부임하였다.
급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제교사라는 깡(强)한 권력으로 학생들을 산으로 몰아 병정놀이를 즐겼다. 밤이면 하숙방에 찾아온 처녀제자와 어울리다 유부남이란 게 들통나 사달이 나기도 했다. “6시 애국 나팔소리”로 일상에 지친 촌민들의 곤궁한 새벽잠을 깨웠다. 아리마(有馬) 교장의 “잠 좀 자자”는 충고에 비상시국에 늦잠 자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무라이식 행패였다. 더런 행실머리에 일제 교장과 군수, 서장의 질책이 쏟아졌다. 그래도 민폐가 계속되자 끝내는 시학관(장학관)의 훈계와 문책을 받게 되었다. 취임 1년도 안 되어 일제관료들의 눈밖에 난 궁상스런 조센징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막다른 쥐가 되자 살인벌이라도 되기 위해 만주의 항일세력 소탕 전쟁터로 도주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애초 항일 독립운동은 돌아보지도 않았던 토착왜구였다. 훈도취임 이듬해인 38년 1차 지원, 39년 2차 혈서지원, 40년 3차 지원의 행적으로 볼 때 고난의 식민지 교육현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내선일체의 굴레에 고달픈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병정호령 놀이감으로 허기진 대열에 세워 뜀박질시킨 야만적인 가해자였다.
장교권력이 보장되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이 나이가 많아 불허되자, ‘한번 죽음으로 천왕에게 충성함’(一死以テ 御奉公 ; 1939.3.31. 만주신문)이라는 충성혈서를 바친다. 이런 견마의 충성혈서에도 불구하고 다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훈도직 견책 파면의 위기와 2차 낙방의 궁지에 몰리자 동향(구미)의 간도특설대 ‘강재호’ 대위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다. “39년8월 대사하전투에 지원하고 학살과 약탈로 악명 높은 간도 (조선인)특설대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한다.(류연산 :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이런 전공과 후견인 강재호 대위의 보증에다 직접 시험장에 데려가는 후의로, 40년4월 만주군관학교 입학이라는 ‘부의’(溥儀)의 성은을 입는다. 그리고 일제신민의 우등생이 되어 일본육사 일왕의 생도가 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조센징 냄새를 세탁하기 위해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까지 한다.
졸업 후 44년7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어 12.23. 소위로 임관된다. 평소 구석에 처박혀 말이 없고 침울하던 다카기 마사오였다. 그러나 항일조선인 토벌명령이 내려오면, 정신 나간 놈처럼 “요오시(好 ; 좋다) 조센징 토벌이다”고 큰소리로 외치며 튀어 나갔다 한다. 그 바람에 “저거 좀 돈 놈 아닌가”하며 혀를 찼다고, 함께 군 생활한 일본인 장교들은 회상했다.
45년8월 중국 열하성 반벽산 일대에서 동북지역 8로군과 항일연군에 대한 극렬한 소탕전투를 만주군 제8단이 수행했다. 이 제8단의 단장부관이던 혈구야차는 일제 패망 후 쏘련군에 포로가 되면 처벌받을 궁지에 몰리자 현지탈출을 모색한다.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은 3광작전으로 훈련된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탈영도 아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중국 국민당 군부대를 찾아가 투항한다. 그리고 역사적 야합의 사생아 ‘평진부대’라는 귀향대 광복군제3지대를 음모 조직한다.(대대장 대위 신현준, 1중대장 중위 이주일, 2중대장 중위 박정희, 3중대장 중위 방원철 :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은 모두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였다)(끝).
림구호
오는 4월9일은 "세계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된 "사법살인" 50주년 입니다. 국가폭력의 사법학살 범죄자가 추앙받는 현실이 기가막힙니다. 국가폭력에 생명과 존재가 파괴 수난 당한 사람들의 상처는 아물 여지조차 압류된 상태입니다.
무능하고 게을러 이제 겨우 짧은 글을 정리하여, 10회로 나누어 포악한 가해자의 죄상을 폭로하려 합니다. 부분적이고 여물지 못한 글 입니다. 눈물을 비명을 쓰다듬는 손길로 읽어 주시길 기대합니다.
6-1) [전쟁권력 反人악귀] 2025.3.6.
※ 전쟁권력은 군사무력으로 권좌를 찬탈하고,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비상사태로 권력과 권세를 유지 재창출하며, 주권자인 백성을 향해 총구를 겨누거나 발포하는 권력을 지칭한다.
6) 血狗夜叉(혈구야차 : 피투성이 개 같은 악귀) : 다카기 마사오
(高木正雄, 일명 岡本実 오카모토 미노루 : 6~70년대 별칭 ☆①)
(79.10.26.)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일본 외교관)
[벚꽃길 따라]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꽉 다문 입 꼬라지”, “어허 그놈 뒤 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은 “청백리”가, 시인 김지하가 담시 “오적”에서 노래한 다카기 마사오다.
일본군국주의 36년이 "조센징 사냥꾼"으로 훈련시켜낸 ‘금시계’ 등급이다.
‘8.15민족해방’과 ‘4.19민주혁명’을 군화발로 짓뭉갠 사무라이 칼춤을 즐긴 만주 관동군이다.
1961.5.16. 민족통일 운동가와 민주투사들을 서대문형무소에 강금, 피의 신새벽을 연 한국명 박정희다.
지금은 TK왕국에 “반신반인”의 구리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혈구야차 박정희는 모진 운명을 타고 태어난 추종불허의 ‘악바리’였다.
일제가 하사한 급장권세의 ‘대추방망이’를 틀어쥐고, 소학교 38명 급우들을 쥐 잡듯 따귀 때리며 몸을 만들어 대구 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4학년 73/73위, 5학년 69/70위의 성적으로는 급장권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리카(有川)와 교련훈도의 각별한 총애 속에 권투와 검도, 그리고 나팔소리로 상실의 울분을 삭혔다 한다. 이런 뒤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던 문경소학교 식민지 훈도로 부임하였다.
급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제교사라는 깡(强)한 권력으로 학생들을 산으로 몰아 병정놀이를 즐겼다. 밤이면 하숙방에 찾아온 처녀제자와 어울리다 유부남이란 게 들통나 사달이 나기도 했다. “6시 애국 나팔소리”로 일상에 지친 촌민들의 곤궁한 새벽잠을 깨웠다. 아리마(有馬) 교장의 “잠 좀 자자”는 충고에 비상시국에 늦잠 자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무라이식 행패였다. 더런 행실머리에 일제 교장과 군수, 서장의 질책이 쏟아졌다. 그래도 민폐가 계속되자 끝내는 시학관(장학관)의 훈계와 문책을 받게 되었다. 취임 1년도 안 되어 일제관료들의 눈밖에 난 궁상스런 조센징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막다른 쥐가 되자 살인벌이라도 되기 위해 만주의 항일세력 소탕 전쟁터로 도주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애초 항일 독립운동은 돌아보지도 않았던 토착왜구였다. 훈도취임 이듬해인 38년 1차 지원, 39년 2차 혈서지원, 40년 3차 지원의 행적으로 볼 때 고난의 식민지 교육현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내선일체의 굴레에 고달픈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병정호령 놀이감으로 허기진 대열에 세워 뜀박질시킨 야만적인 가해자였다.
장교권력이 보장되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이 나이가 많아 불허되자, ‘한번 죽음으로 천왕에게 충성함’(一死以テ 御奉公 ; 1939.3.31. 만주신문)이라는 충성혈서를 바친다. 이런 견마의 충성혈서에도 불구하고 다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훈도직 견책 파면의 위기와 2차 낙방의 궁지에 몰리자 동향(구미)의 간도특설대 ‘강재호’ 대위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다. “39년8월 대사하전투에 지원하고 학살과 약탈로 악명 높은 간도 (조선인)특설대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한다.(류연산 :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이런 전공과 후견인 강재호 대위의 보증에다 직접 시험장에 데려가는 후의로, 40년4월 만주군관학교 입학이라는 ‘부의’(溥儀)의 성은을 입는다. 그리고 일제신민의 우등생이 되어 일본육사 일왕의 생도가 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조센징 냄새를 세탁하기 위해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까지 한다.
졸업 후 44년7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어 12.23. 소위로 임관된다. 평소 구석에 처박혀 말이 없고 침울하던 다카기 마사오였다. 그러나 항일조선인 토벌명령이 내려오면, 정신 나간 놈처럼 “요오시(好 ; 좋다) 조센징 토벌이다”고 큰소리로 외치며 튀어 나갔다 한다. 그 바람에 “저거 좀 돈 놈 아닌가”하며 혀를 찼다고, 함께 군 생활한 일본인 장교들은 회상했다.
45년8월 중국 열하성 반벽산 일대에서 동북지역 8로군과 항일연군에 대한 극렬한 소탕전투를 만주군 제8단이 수행했다. 이 제8단의 단장부관이던 혈구야차는 일제 패망 후 쏘련군에 포로가 되면 처벌받을 궁지에 몰리자 현지탈출을 모색한다.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은 3광작전으로 훈련된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탈영도 아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중국 국민당 군부대를 찾아가 투항한다. 그리고 역사적 야합의 사생아 ‘평진부대’라는 귀향대 광복군제3지대를 음모 조직한다.(대대장 대위 신현준, 1중대장 중위 이주일, 2중대장 중위 박정희, 3중대장 중위 방원철 :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은 모두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였다)(끝).